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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I have no mouth, and I must scream)/ 할란 엘리슨/ 아작/ 2014
재능이 너무 뛰어난 사람을 보고 우리는 악마의 재능을 지녔다고 부르곤 한다. 바로 할란 엘리슨같은 사람을 말이다.
그는 TV쇼 각본, 시나리오, 에세이, 미디어 비평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1955년 데뷔한 이래 1700여 편의 글을 쓰고, 114권의 책을 쓰거나 편집하고, 12편의 시나리오를 작성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중단편 만으로 휴고상, 에드거상, 네뷸러상, 세계판타지문학상 등 각종 문학상을 60여 차례나 수상하였다.
단순히 많이 쓴 것만이 아닌 깊이가 있는 글을 썼다는 게 할란 엘리슨의 공포스러운 부분이다. 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은 할란 엘리슨이 얼마나 짜증났을까. 내가 아무리 글을 써도 할란 엘리슨이 수상한다고 생각하니 생각만 해도 글을 쓰고 싶은 의욕이 사라지는 것 같다.
책에는 책 제목으로 나온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를 비롯한 할란 엘리슨의 작품들 중 문학상을 수상한 걸작들을 몇 편 수록되어 있다. 나는 이 작품들 중 '마노로 깎은 메피스토',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를 소개해보려 한다.
<마노로 깍은 메피스토>
주인공 루디는 흑인이며 남의 정신 속에 들어갈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다. 그는 이 능력을 별로 탐탁치 않아 했는데, 남의 속마음을 읽었을 때 좋았던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들의 알고 싶지 않았던 속사정이나 겉으로는 주인공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지만 실제로는 인종차별자로 주인공을 무시하고 있었다는 속마음같은 것 말이다.
주인공의 능력탓인지 그의 주변에는 속마음을 나눌만한 친구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었는데, 이야기는 그의 친구 앨리슨과 루디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살인범 스패닝을 기소한 지방검사 차장 엘리슨은 루디에게 자신이 스패닝에게 반했으며 스패닝은 사실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루디는 엘리슨의 말에 충격을 받는다.
그야 당연했다. 자신이 기소한 살인범에게 반한 걸로 모자라 그가 무죄라고 생각한다니. 루디는 처음엔 스패닝을 만나러 가는 걸 거절하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친구이며 동시에 이성으로서 호감을 갖고 있는 엘리슨의 부탁에 결국 스패닝을 만나러 간다.
스패닝을 만난 루디는 충격을 먹는다. 스패닝은 백인에 살인범같지 않은 훤칠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패닝의 정신 속에 들어간 루디는 사실 본인이 살인마이며,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본인의 또 다른 부분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걸 알게된다.
루디는 자수하였고, 시간이 되어 본인의 사형을 기다리는 중 루디는 스패닝 또한 본인처럼 남의 정신 속에 들어갈 수 있으며, 사실 루디는 살인범가 아니며 스패닝에 의해 기억이 외곡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루디는 본인의 능력을 사용하여 루디 자신의 몸에 스패닝의 정신을 남겨두고, 스패닝의 신체로 본인의 정신을 이동시킨다. 그리하여 살인범 스패닝은 루디의 신체로 죽으며, 루디는 엘리슨과 스패닝의 신체로 연인이 된다.
어찌보면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 이야기에는 해결되지 못한 수수께끼가 몇 가지 존재한다.
1. 루디가 스패닝의 신체로 엘리슨과 연인이 되었다고 하되 이는 진짜로 사랑이 이루어진것인가.
엘리슨은 흑인 루디에게는 엄연히 우정만이 있었을 뿐 애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흑인 루디가 백인 스패닝이 된 것으로 엘리슨과 애정을 나눌 수 있게 된다는게 과연 진짜로 행복한 것인가. 결국 루디는 본인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엘리슨에게 고백할 수도 다가갈 수 없었다.
2. 엘리슨이 스패닝이 이전의 스패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때 어떡할 것인가.
엘리슨은 루디의 정신이 들어간 스패닝이 아닌 살인범 스패닝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루디는 엘리슨과 함께 있을 때 스패닝이 어떻게 행동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엘리슨은 지방검사 차장인만큼 머리가 잘 굴러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런 위화감을 눈치채지 못할까? 엘리슨은 루디가 정신 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다. 이 위화감과 루디의 능력을 연관짓는다면 엘리슨이 진실을 파악하는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만약 엘리슨이 위화감을 눈치채더라도 상관없이 스패닝을 사랑한다면 그건 엘리슨이 스패닝의 인격적 부분이 아닌 외면적 부분만 좋아했다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루디는 엘리슨을 좋아하는 데엔 본인의 능력을 알면서도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다는 믿음직한 인격적 측면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런 엘리슨이 사실 얼굴만 좋다면 내용물은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면 꽤나 큰 충격을 먹을 것이다.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
위의 내용은 여러가지 생각점이 존재하지만 이 이야기와 비교하면 100%로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이 이야기는 꿈과 희망이 없다.
원래 이 이야기야말로 할란 엘리슨의 성격에 맞는 글이다. 할란 엘리슨은 희망없는 내용의 글을 주로 작성하였다.
인간이 거의 다 죽고 유일하게 남은 인간은 5명뿐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인공지능을 지닌 컴퓨터 AM의 장난감이었다. AM은 그들을 개조해 쉽게 죽지 않도록 만들곤 온갖 고문을 시행하였다.
제 3차 세계 대전에 제작된 AM은 어느 날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살인에 대한 온갖 데이터를 활용하며 유일하게 남은 5명을 땅 아래로 데려왔다.
인간은 AM에게 지각력을 주었으나 AM은 여전히 갇힌 몸이였다. AM은 생각을 할 수 있으나 그 창조성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인간을 5명 빼고 다 죽였지만 AM은 여전히 돌아다닐 수 없었다. 여전히 갇혀있어야 했다.
그래서 AM은 인간에게 혐오를 품고 복수에 나섰다. AM은 영원히 증오를 상기시키고, 그 증오에 숙달하기 위해 5명의 인간을 살려두었다.
평소처럼 이루어진 AM의 고문은 이번에는 꽤나 길게 지속되었다. 결국 허기를 이기지 못하고 베니가 고리스터를 공격하였고, 테드는 눈밭에 꽂힌 얼음창을 뽑아냈다.
테드는 베니, 고리스터를 죽였고 엘렌은 님독을 죽였다. 그리고 테드는 엘렌을 죽였다. AM은 신이 아니므로 죽은 인간을 되살릴 수 없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간 테드는 본인이 AM을 이겼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분노한 AM에 의해 형태가 일그러졌다. 그는 입이 없지만 비명을 질러야 한다.
앞선 4명과 달리 테드는 앞으로 절대 죽을 일이 없을 것이다. 감시 대상이 줄어들었으니 AM의 감시는 이전보다 엄격해졌을 것이고, 형태 또한 애벌레와 같이 변하여 스스로 죽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또 그는 현재 입이 없으나 비명을 질러야만 한다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다. 이렇게까지 희망없는 엔딩이 있을까.
AM에게서 4명을 구해내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테드는 자신이 졌다고 말한다. 나는 이를 죽음으로서의 도피는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몇 명의 사람이 죽음으로서 고통에서 벗어나긴 하였지만 결국 이 세상에 AM이라는 악은 남은 상태였으며, 테드와 같이 남겨진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죽음으로는 남겨진 자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이런 희망없는 어두움, AI에게 끔찍하게 지배당하는 인간이라는 소재덕분에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는 만화, 게임 라디오 드라마와 같은 다양한 콘텐츠로 제작되었다. 퀄리티가 좋은 작품들이므로 관심이 생긴다면 한 번 찾아봐도 괜찮을 거 같다.
할란 엘리슨의 작품들을 몇 편 읽으면서 나는 할란 엘리슨이 사람의 내면 속 깊은 감정에 대해 굉장히 자세히 알고 있다고 느꼈다. 이 책에 수록된 그의 작품들은 대다수가 내면의 자기 본질과 마주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하며,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되지 않는 것에 심한 두려움을 느낀다. 그의 작품에서는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이들이 자신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매우 어두운 내용의 이야기가 대다수이다. <마노로 깍은 메피스토>는 책에서 제일 첫 번째로 읽게 되는 작품이다. 찝찝한 느낌은 있으나 작중 서술하는 표현과 감정을 살펴보면 이 이야기는 그리 나쁜 결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작품들은 이 작가가 <마노로 깍은 메피스토>를 쓴 작가와 동일 작가인가 헷갈릴 정도로 희망없는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나는 입이 없다 그리고 나는 비명을 질러야 한다>만 봐도 알 수 있다.
왜 인간의 감정에 민감한 사람이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를 주로 적은 것일까? 책 뒤편의 해설을 살펴보면 할란 엘리슨은 본인의 감정에 솔직하였고 분노와 비평을 소설 속에 적어나갔다고 한다. 그의 작품의 대다수가 어두운 건 그만큼 비평할 게 많았다는 거 아닐까? 실제로 만나면 매우 귀찮은 성격이였을 거 같지만, 이러한 예민함은 소설가로서는 더할 나위없는 소질이라고 생각한다.
할란 엘리슨은 소설계의 문제아였다고 한다. 대학에 입학하고 그의 창작 능력을 무시하는 교수를 두들겨 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감정적이며 인간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지녔었다. 시위에도 참여한 적이 있으며 소설 자료를 얻기 위해 잠입도 해봤다.
이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은 생각치도 못했을 글쓰기 소재들이 넘쳐나지만 제일 중요한건 그는 글을 잘썼다. 정말 악마의 재능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남들과는 다른 독특한 경험들과 사고방식, 글쓰기의 재능을 가지고 써 낸 그의 소설들이 재미없을리가 없다. 한 번 눈을 붙인 순간 눈을 땔 수가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몰입하게 되며, 다 읽고 나서도 여러 생각에 빠지게 한다.
해피엔딩에 질렸다면 가끔씩은 이런 소설에 도전해보는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