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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Blood Meridian or the Evening Redness in the West)/ 코맥 매카시/ 민음사/ 2009
여러 대중 소설들은 인간성의 아름다움, 인간의 의지를 다루며, 우리는 이와 같은 소설들을 보면서 용기와 에너지를 얻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지독한 허무주의로 이루어진 잔혹한 현실에 대해서도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핏빛 자오선'이 바로 그러한 소설이다.
<잔인한 역사>
작품은 미국의 서부개척시대를 시대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부개척시대란 미국사에서 미국의 독립을 전후하여 유럽인의 문명이 닿지 않고 독자적인 원주민 문화가 존재하던 서부 황무지로 미국이 영토를 확장하던 시기를 말하며, 이때 개척자들의 탐욕에 의해 수많은 학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작품의 주요 내용은 미국인(개척자) VS 인디언(정착자)의 전투로 이루어져있다.
문제는 이 전투가 생각보다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미국인이든 인디언이든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이니 상대방을 인간으로 보지 않을 것이며, 이들을 죽이고 나면 자신들의 승리를 증명할 전리품이 필요할 것이다. 확실하게 승리를 증명하는 데에는 쓰러트린 자들의 신체 일부야말로 최적의 전리품일 것이다. 그래서 작품 속에서는 상대방의 신체 일부를 자르거나 뜯어내는 묘사가 매우 많이 나온다.
과장해서 작품의 80%가 전투하는 내용이니 독자는 80%의 내용동안 이와 같은 묘사를 계속해서 봐야한다는 말이다.
만약 잔인한 걸 좋아하지 않거나 사실적인 내용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읽지 않는 것을 권장한다.
<도덕성과 상식의 상실>
잔인한 것을 버틸 수 있다 하더래도 이젠 도덕성과 상식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작품은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미국인과 인디언의 전투가 주 내용이다.
서로 생김새도 복장도 언어도 모든 것이 다른 이들이 서로를 같은 인종으로 치부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작중 전투 묘사를 보면 엄숙함, 진지함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죽지 않으려고 꼴사납게 발바둥치며, 상대방을 죽이게 됐을 때는 최대한 잔인하게 죽이고 이를 놀이마냥 재밌게 여긴다.
인디언에게만 이랬을까? 여정 도중 들리게 되는 마을에선 며칠 내내 술 파티를 열고는 자신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은 총으로 쏴 죽이고, 몇몇 마을은 떠날 때 불태우기까지 한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다. 아무 원한도 없는 일반인을 총으로 쏴죽이고는 마을을 불태우다니
그러나 작중 배경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다. 서부 개척 시대는 단기간에 광활한 미개척지에 많은 사람이 퍼져 살기 시작했기 때문에 치안 체계가 심각할 정도로 부실했다.
누가 일반인인지 범죄자인지 구분조차 어려웠을 정도이다. 작품 속 인디언을 잡기 위해 구성된 팀 인원도 극히 일부가 군인이지 나머지는 떼돈을 벌기위해 지원한 민간인이었다. 심지어 주역이었던 '소년'은 팀 구성 당시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명사수라고 거짓말한 후 풀려나 팀에 합류한 것이다.
무법지대에서의 미국인들이 어떠한 생활을 하였는지 이렇게나 꾸밈없이 드러내는 책은 아마 이 책이 유일할 것이다.
<죽음만이 진실이다>
미국인과 인디언은 영토를 두고 계속해서 다퉈왔으나 결국 그들의 끝은 동일한 죽음이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인물에겐 정을 붙여선 안 된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죽어있을 수도 있으니까
선행을 배풀든, 악행을 저지르든, 인디언이든, 미국인이든, 인종에 관계없이 그 누구든지 결국 죽는다.
작중 미국인들을 죽이고 유마 인디언들이 장작불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유마 인디언들은 장작에 끼어 죽어가는 적의 두개골을 보며 자신의 운명이라도 읽듯 가만히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이는 지금 승리를 거둔 유마 인디언들도 결국 또 다른 미국인 혹은 정복자에 의하여 자신이 죽인 이들과 같이 장작불 속 머리가 타들어갈거란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미국은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하였다. 작품에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 현실의 유마 인디언도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허무함을 작품은 계속해서 내비치고 있다.
몹시 잔인한 소설이다. 그러나 의미가 있다.
서부개척시대라는 미국 영토 확장 과정이라는 겉표지 속에 감춰진 잔혹한 현실을, 그동안 여러 매체에서 감춰왔던 인간의 잔인함을 숨김없이 드러낸 것이다.
원서의 출판 년도가 1985년이라고 한다. 서부개척이 이루어진지 약 100년 정도 지났을 때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전해져 내려오는 내용에는 거짓과 왜곡이 섞이기 마련이다.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진행했던 기간 및 최초 출판 년도를 고려했을 때 이만큼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은 적을 것이다.
만약 어느 정도 잔인한 묘사를 참을 수만 있다면 한 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
읽을 때는 '타임'선정 100대 영문 소설에 선정된 이유가 필력때문인가 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준수한 필력도 물론 선정 이유에 포함되겠지만 그보다도 현재 미국 영토에 담긴 핏빛 역사를 숨김없이 드러내었다는데 큰 가산점이 들어갔을 거 같다.